윤섷

Backstage

by. 하나로백

온오프라인 통틀어 도서 플랫폼을 다루는 M출판사, 그곳의 차남 박성화와 인연을 맺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게 쏟아지는 요청은 많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제안 중 정윤호를 만나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얼굴과 피지컬 모두 매력적이다. 남자여자 가리지 않는 그이지만, 성화는 자신과 같이 빛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정윤호는 그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외형이었다. 그의 키는 성인 남성들 속에서 솟아올라 보일 정도로 크고, 어두운 행사장 조명 아래에서도 잘생겨 보이는 외모였다. 


두 번째 이유가 성화의 마음을 굳혔다. 정윤호가 소속된 회사와 업무가 매력적이었다. 성화가 소속된 회사는 ‘글’을 다루는 곳이라 생각 이상으로 딱딱한 사람들과 많이 엮였다. ‘글’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M사와 달리, 윤호가 속한 Y사는 대중음악과 예능 분야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여 가장 트렌디한 방송 문화를 주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방송사였다. Y사의 장남이자, 대중음악 투자를 담당해 좋은 평가를 받는 정윤호의 타이틀은 성화의 눈에 띄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성화는 정윤호란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만남에서 성화는 정식으로 만나보자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만난 곳은 윤호네 회사가 공들여 초청한 해외가수의 내한 공연장이었다.

이 가수의 내한 공연은 국내에서 가장 큰 공연장에서 진행했음에도, 수 분 만에 매진되는 인기를 보였다. 이 공연에 성화의 자리가 있었던 것은 윤호가 마련한 초대권 덕분이었다. 성화의 옆자리는 당연히 윤호였다.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은 곧장 헤어지기에 아쉬움을 느껴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아, 성화는 공연의 여운에 젖어 말했다.


“통화하는 나레이션 파트에서 폰부스를 놓을 줄 몰랐어요.”

“힘들던 시절에 통화했던 순간이 큰 힘이 된 걸 보여주고 싶었대요.”

“와,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


윤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화 씨가 더 즐거우니 좋네요.”


윤호는 성화의 감동에 공감하며, 음악과 공연에 숨겨진 더 많은 이야기를 추가로 풀어내 주었다.


이렇게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성화는 윤호와의 대화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즐겼다. 윤호는 단순히 경청하는 것을 넘어서, 성화의 경험을 더 깊이 있고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성화는 이러한 윤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본인의 일을 단순한 부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예술에 깊이 몰입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성화는 윤호가 자신과 인연을 이어 나갈 때에도 전략적인 관계가 아닌, 감동을 계속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성화는 지금이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드러낼 질문을 시작한다.


"윤호 씨는 공연을 구성하는 법을 잘 아시는 거 같아요. 전공은 경제학이라 들었는데 따로 예술을 배우신 적이 있나요?"

"저는 춤이 취미에요. 저에게 춤은 운동이거든요. 무대 위를 가득 채우는 움직임이 재미있어요. 요즘도 월요일 저녁마다 모임에 나가요."


성화가 윤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세계는 취미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악기 연주를 취미로 시작하여, 락밴드 공연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지 어언 5년째다. 일반 직장인이어도 투잡으로 보이는, 하지만 소득은 없이 즐기기만 하는, 특이한 상황. 이런 성화의 일상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왔다. 윤호가 방금 한 대답은 공감대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자신을 존중해 줄 것 같은 확신에 찬 성화는 꼬리를 무는 질문을 이어간다.


"매주 다닌다니 잘 추실 것 같아요. 공연할 생각은 없어요? 보러 가고 싶어요."

"공연요? 전혀. 저희가 돈을 많이 들여서 배워도 어릴 때부터 배운 사람들이랑 시작이 다르잖아요. 제가 추는 건 한계가 있죠. 도전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윤호의 말에 성화는 순간 머뭇거렸다. 공연장의 분위기 속에 취해 나누었던 그들만의 이야기는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성화는 자신의 열정을 공유하고자 했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밴드 활동이, 윤호에게는 단지 취미일 뿐, 진정한 예술가들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것만 같았다.


"시작이 언제였든, 열정이 있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의 시작이지 않을까요? 진심이라면 그 자체로 빛날 수 있는 거죠."


성화의 눈빛에는 꿈이 가득 찼다. 하지만 윤호의 눈빛은 성화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저희는 빛날 수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구요."

“투자요?”

“네.”

“아.. 그렇군요”


성화의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그는 이 대화를 통해 윤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느꼈다. 성화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실현하려 했던 반면, 윤호는 현실적으로 해야 할 역할을 더 중시하는 것 같았다.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 대화는 다시 편안한 주제로 진행되었지만, 성화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 불편한 순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화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저녁 식사에서의 대화가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윤호 사이의 대화는 사고의 깊이를 넓혀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성화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느꼈고, 그 차이를 넘어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성화는 생각을 끝냈다. 근본적인 이해를 이을 수 없다면, 이 관계를 빨리 정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통은 먼저 샤워 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행동하기로 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어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거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성화는 이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확신했다. 수화음이 들리는 동안 성화는 마른 침을 계속 삼켰다.


윤호가 전화를 받았을 때, 성화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업을 논의할 때 만나는 사이가 되는 게 어떨까요?"

윤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목소리에 아쉬움을 실어서 대답한다. 

"성화씨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따를게요. 하지만 한 번 더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ㄴ..."


윤호가 미련을 붙여 말을 길게 늘리려고 하자, 성화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정리하였다.

"일정은 비서를 통해 연락하시죠." 


성화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고 성화는 한동안 정적 속에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만 봤다. 이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서 나아질 게 보이지 않는다면 놓아주는 게 맞다. 그는 마침내 윤호의 연락처를 스마트폰에서 삭제하며 이 장을 닫았다. 수신 거부 목록에 추가하고, 번호를 지우는 그 순간, 박성화에게 정윤호는 과거의 사람으로 남는다.






둘 사이의 이야기가 끝난 지 1달이 지났다.

성화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화가 지향하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밴드 활동에 대한 이해를 받는 것이 그가 원하는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윤호와의 대화가 깊은 영감을 주고, 그의 외모가 흠잡을 데 없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자신의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가끔 그가 떠올라도, 스스로를 다잡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윤호는 달랐다. 성화와의 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마음속은 끊임없이 수렁으로 내려가곤 했다. 가족의 제안으로 시작한 만남이었으나 그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고, 함께 있을 때 눈이 빛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평소와 똑같았던 만남 뒤 찾아왔던 전화는 윤호를 순식간에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무엇이 성화가 끝을 말하게 만들었는지조차 듣지 못한 게 힘들었다. 이유라도 알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았다. 고칠 수 있는 원인이라면 무엇이든 고치겠으니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고 싶었다.


평소 윤호가 있는 사무실은 밝은 웃음소리와 열정적인 의견들로 가득 찼었다. 크고 오래된 회사임에도 젊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윤호의 노력이 컸다. 그는 적시 적소에 좋은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은 많은 순간을 챙겼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좋은 결과는 따라온다는 것을 윤호가 믿었기에 했던 실행이다.


하지만 성화와 헤어진 후로 사무실의 분위기는 급격히 변했다. 자신의 마음도 잘 다스릴 수 없는데 남을 맞춰줄 수 없었다. 윤호가 공간에 들어서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팀원들 사이에서도 차가운 침묵을 강요했다. 평소처럼 업무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게 오가는 회의실도 이제는 조용히 윤호의 눈치만 보는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그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두 사라진 듯했다.


윤호의 책상 위에는 마지막으로 성화와 같이 갔던 공연의 티켓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자주 그 티켓을 손에 들고는 무심코 바라보곤 했다. 그 티켓은 그들의 추억, 그리고 그가 잃어버린 것의 상징처럼 윤호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가 그 티켓을 손끝으로 훑고 있을 때, 직원 중 한 명이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윤호는 급히 티켓을 마우스 패드 밑으로 숨겼지만, 그의 마음속 감정은 그렇게 쉽게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 1달쨰야.”


팀장실로 들어온 사람은 윤호네 팀 파트장이자, 윤호의 오래된 친구 송민기였다. 월요일마다 같이 춤을 추는 친한 사이였기에 윤호가 무슨 일로 상태가 안 좋아졌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알아.”

“…”


현실을 인지한다는 듯이 대답하는 윤호에 민기는 할 말을 순간 잃었다.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맞으나, 저렇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떤 조언으로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다.


“민기야.”

“어?”

“우리 드라마에 투자할까?”

“드라마? 드라마는 들어가는 돈이 달라.”

“M사 완결작 중 초인기작을 드라마에 투자하면 성화 씨랑 만날 자리가 한 번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

“야이씨..”

“한 번 상상한 거야. 하하”


사무실에서 비속어를 꺼내지 않는 민기였지만, 제정신이 아닌 윤호에게 바로 욕이 튀어나온다. 요즘 안 그래도 되던 일도 제대로 안 되게 만들어서 답답한데, 저런 헛소리라니.


“나도 투자 이야기해도 돼?”

“무슨 투자?”

"너 요즘 최상급 아니면 다 반려하는 거 알아? HJ 프로젝트. 지난주에 너가 드랍한 락밴드인데, 난 이 밴드가 돈만 조금 더 투자하면 큰 스케일로 공연 표를 팔 수 있고, 우리도 밴드 쪽 투자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봐."


민기의 목소리에는 윤호를 다시금 현재로 불러오려는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윤호는 무심코 "아.. 그 밴드 건도 있었나?"라고 말했다.

민기는 정말 집중을 못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이어갔다. 


"너 캘린더를 보니까 내일 저녁이 비어있던데, 내일 그 밴드 공연을 보러 가자. 한 번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다다음날 내가 재보고 일정도 잡아놓을게."






윤호는 기분 전환 삼아 민기와 공연을 보기로 했다.

윤호와 민기가 그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날, 윤호는 어쩐지 마음이 복잡했다. 공연 가는 길에 윤호는 마지막으로 성화와의 만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공연 티켓을 받고 기뻐하던 성화의 모습, 그의 웃음, 공연을 본 뒤 자신에게 열심히 감상을 풀어놓던 순간까지. 모든 것이 윤호의 머릿속에서 선명한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문제없이 행복해 보였는데, 왜 성화는 관계의 끝을 통보했을까? 윤호의 마음은 공연장으로 향하면서도 성화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공연장에 도착한 윤호와 민기는 2층 지정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장감을 즐기기 위한 관객들의 성향상, 2층은 보통 비어있는 편이다. 하지만 2층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1층 스탠딩석은 이미 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연 시작 전부터 관객들이 먼저 노래를 흥얼거리며 활기찬 기대감을 공연장에 가득 채웠다. 지난 내한 공연도 이랬었지.. 윤호의 기억은 여전히 성화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무거웠다. 민기는 윤호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밴드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음악 스타일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감정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전체 공간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공연은 ‘HJ 프로젝트’ 밴드의 단독 공연이다. 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김홍중을 중심으로 한 밴드가 2시간 동안 멋진 연주를 펼쳤다. 음악은 강렬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밴드의 에너지는 관객들을 몰입시켰다. 윤호 또한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공연 중간에 윤호를 본 민기는 뿌듯했다. 아무리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어도 직접 경험시키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확신했다.


민기의 기대와 달리, 윤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무대 위의 한 사람뿐이었다. 베이스를 연주하는 그 멤버는 그의 체형, 헤어스타일링, 얼굴까지... 모두 성화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윤호는 잠시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2시간 동안의 공연 내내, 윤호의 마음과 시선은 오롯이 그 베이스 멤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주변으로 퍼지는 멜로디는 윤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성화와의 추억과 현재 무대 위의 그 모습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민기는 의기양양하게 윤호에게 밴드의 음악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윤호는 아무런 대답을 뱉지 않았다. 민기는 윤호의 반응에 당혹스러웠다. 분명 공연 중간마다 봤던 윤호는 무대에 집중했는데? 정말 아니다 싶었다면 도중에 집에 가자고 했을 사람인데? 좋다싫다도 아닌 무응답이라니. 예상 밖이었다.


“별로야? 회의 취소해?”


윤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을 줄래? 아니면 내가 회의를 취소할게.”


윤호의 목소리는 꽤나 가라앉아 있었다. 민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호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윤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연장에서 느낀 성화에 대한 미련, 그리고 무엇보다 그 베이스 멤버가 성화였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능성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바라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1달간 바랬던 기회이기도 했다. 성화를 한 번만 다시 만나고 싶었다. 성화의 입을 통해 우리가 끝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간절한 사람은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속는 셈 치고 이 기회를 잡아보고 싶었다.


윤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곧장 노트북을 켰다. 그는 회의 캘린더를 볼 수 있는 그룹웨어 홈페이지를 열어 ‘HJ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곧 있을 회의 일정이 검색 결과로 나타났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곧바로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메일을 작성하는 동안, 윤호는 hj프로젝트의 음악이 담긴 유튜브 영상을 배경음악 삼아 재생했다. 그 음악은 공연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금 불러일으켰고, 윤호는 그 순간들을 되새기며 키보드를 눌러 글을 썼다.


아래와 같이 적어, 메일을 발송했다.

"회의 전, hj프로젝트와 관련해 몇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 이메일을 보냅니다. 실제로 공연을 직접 관람해 보니, 지난번 제가 반려했던 투자 건에 대한 제 생각이 크게 바뀌었네요.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hj프로젝트에서 김홍중 이외의 세션 멤버 구성과 그들의 배경에 대해 보고 받고 싶습니다. 이들이 장기간 활동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지, 윤리적인 리스크를 확인 바랍니다."


팀원들이 조사한 결과에서 베이스 세션은 ‘M출판사 차남 박성화’가 맞았다.


이번 회의에서 윤호가 얻은 것은 저 내용 단 하나였다. 나머지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합을 맞추면서 일을 잘하는 민기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민기가 다시 한번 투자해 보자는 제안만으로 추진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머지에 집중할 정신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 있던 사람이 박성화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윤호는 왜 성화가 자신을 놓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윤호 자신은 취미는 취미일 뿐 우리가 예술을 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성화는 열정을 갖고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계를 말하며 자신의 좁은 시야를 드러낸 자신. 그것은 우린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언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윤호의 걸음걸이는 무거웠다. 회의에 함께 들어갔던 송민기는 팀장실로 향하는 윤호를 붙잡았다. 하루 이틀 일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윤호의 행동으로 속을 이미 파악했다.


"너 언제부터 베이스 세션이 성화 씨인 걸 알았어? 오늘 제대로 투자 검토한 거 맞아?"


민기의 질문에는 궁금증과 우려가 섞여 있었다. 윤호는 민기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털어놓는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걸 보고 나서 알았어. 한 번 더 팀원을 통해서 확인받고 싶었어. 그리고 투자 결정은 너가 하자는 대로 하려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내가 질게.”


민기는 윤호의 대답에 잠시 침묵했다. 그는 윤호가 이틀 동안 고민한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내가 일을 잘하긴 하지? 정윤호 팀장님이 시말서 쓰게 안 만들어. 걱정마.”

“고마워.”

“우리 사이가 뭘. 더 필요한 거 있어?”

“일단, 초대권.”


윤호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타인의 한계를 단정 짓지 않고, 상대를 인정하려는 변화. 그리고 끝을 넘어 새롭게 시작하려는 변화. 두 가지 변화에 도전한다. 






‘HJ 프로젝트’의 이번 공연 역시 대성공이었다. 공연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백스테이지에서 멤버들끼리 서로 화목한 분위기로 악기와 케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홍중은 공연의 만족감이 가득 차 있는 멤버들에게 기쁜 소식을 추가로 전했다. 


"우리, y방송사에서 투자를 받기로 했어. 이번에 전국 투어를 같이 해보는 식으로 시작할 거야."


성화는 홍중의 말에 기뻐했다. 음악을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인 자금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투자이기에. 그래서 미소를 지었으나, 입꼬리 끝은 어두웠다. Y방송사는 정윤호가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최근 있었던 일을 묻어두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지만, 마음 한편에는 윤호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성화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래? 이제 우리 TV에도 나오겠네."

홍중은 웃으며 성화의 말에 대꾸했다. 

"맞아. 넌 재벌 2세인데 사회경제면보다 연예 면에 먼저 얼굴이 뜨겠다."


그의 농담에 성화도 밴드 멤버들도 모두 따라 웃었지만, 그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정윤호가 스스로를 소개할 때 회사에서 투자하는 것들은 다 본인 손을 거쳐 간다고 했는데, 우리도 한 번 본 적이 있을까. 내가 있는 걸 알았을까. 만약 몰랐다고 해도 앞으로 알게 되는 걸까. 사업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지금 다시 만날 때 내 마음은 괜찮을까. 홍중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여러 불안감이 존재한다.


성화는 조심스럽게 홍중에게 물었다. 

"세션 멤버들도 y방송사와 계약하는 거야?"

홍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만 하면 된대. 만나고 싶으면 알려줘. 나 갈 때 너도 따라가는 건 문제없으니까." 


홍중은 성화가 관심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성화의 대답은 "생각해 볼게." 였다. 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홍중의 눈은 동그랗게 크게 떠졌다. 성화가 이런 자리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홍중은 성화의 속마음을 파악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성화가 웬 일?”


성화는 순간 멈칫했다. 마음 속,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적당히 둘러대며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냥.. 여러 가지를 미리 알면 좋으니“


그들의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 순간, 백스테이지의 무거운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백스테이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향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문이 열린다면, 공연장을 관리하는 건물 직원들이 무엇인가를 절단하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복된 경험을 한 세션 멤버들은 대화를 잠시 멈췄을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홍중만이 유일하게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대응하는 식이다.

성화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편이지만,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초대권을 통해 공연을 본 정윤호가 백스테이지를 찾아왔다. 성화를 제외하고 윤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홍중조차 윤호가 처음이었다. Y방송사와 계약을 진행하는 동안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을 만나는 건 송민기까지였다. 윤호는 처음부터 HJ 프로젝트의 계약 건을 민기에게 모두 위임했기에, 그에게 계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생소한 일이었다.


윤호는 성화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성화 씨,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성화는 윤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홍중에게 먼저 나가겠다고 말하며 악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성화의 심장은 건물 밖을 나갈 때까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윤호를 생각한 걸 들키기라도 한 듯 나타난 타이밍이 예상치 못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기로 한 공간은 윤호의 차 안이었다. 보는 눈이 있을 수 있으니 최대한 사적인공간을 고르는 게 좋았다. 차 안은 카오디오도 켜져 있지 않은 채 조용함이 감싸고 있었지만, 둘의 귀에는 본인의 심장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고 있다.


윤호는 진심을 담은 사과로 첫마디를 건넸다.

“투자를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직접 공연을 보러 왔다가 알게 되었어요. 그날 식당에서 한 말, 정말 미안해요.”

“아… 괜찮아요.”


끝내자는 통화에서 윤호는 미련을 보였기에 성화는 ‘다시 만나자는 제안을 하는 게 아닐까’ 약간의 기대를 했다. 윤호의 첫 마디에 성화는 허탈해졌다. 투자하게 되는 사업적 관계로 이어나갈 것이라 애매한 사이를 정리하기 위해 따로 부른 거였네…


그러나 윤호가 덧붙이는 말은 성화의 예상을 뒤집었다. 


“투자도 결정되어서 오늘 공연을 또 보러 온 거였어요. 다시 봐도 정말 멋지더라구요. 이건.. 성화 씨가 계속 멋진 음악을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에 준비했어요.”


윤호는 선물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들고 있는 윤호의 손은 섬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원래 하얗던 손은 더 차갑게 하얀 빛을 띄고 있었다. 성화가 거절할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

봉투 속에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예상이 되지 않았으나, 성화는 윤호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봉투를 열어 얇게 반짝이는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성화는 입가에 안도하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와.. 감사합니다.”

“제가 열정이 부족해서 성화 씨도 그렇다고 오해했어요. 성화 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다시 시작하자고 바로 말하지 않을게요. 언제든지 성화 씨를 응원한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은 새 베이스 줄이었다. 끊임없이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베이스 줄 교체는 필수다.

윤호의 진심이 담긴 사과와 선물은 성화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성화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한 채로 윤호의 선물을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줘요. 날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 진짜 만족해요.”


성화의 음성에 기대와 약간의 떨림이 묻어났다. 이 말에 응답하듯 윤호의 얼굴은 행복한 미소를 띄었다. 

이 순간을 이어 나가듯 윤호와 성화는 다음에 만날 날짜를 바로 정했다. 성화의 다음 공연이 있는 날, 윤호는 성화의 연주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이번에 윤호가 앉을 자리는 초대석이 아니다. 성화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백스테이지로 갈 예정이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있는 특별한 자리에서 윤호는 성화를 더 이해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