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영웅들은 항상 칭송받는다.
특이적인 능력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해낸다.
100명을 시민을 구하기 위해 2명의 시민이 죽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절대적 살인자인 그들이 칭송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증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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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무 피곤해. 수면제 좀 처방해 줘.”
“정우영 센티넬님. 저는 센티넬에게 수면제를 드릴 수 없고요, 담당 가이드를 찾아가거나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숨은 지금도 쉬고 있어요. 잠 좀 자게 해줘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아까 본 장면을 잊고..”
“아 진짜. 도움 하나도 안돼. 김 선생님은 뭐 해주는 거예요?”
너 같은 놈들 상담. 홍중은 몇백 번이고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입 열기를 대신 입꼬리만 올렸다. 하루에도 몇 번의 찡찡거림을 듣는지 셀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이런 꼴통들한테 왜 상담이 필요한지, 홍중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늘도 진전없는 상담을 끝내고 잔뜩 피로해진 몸을 이끌고 상담실을 나왔다.
센터 밖에선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영웅, 즉 센티넬들은 센터로 들어오면 자기 힘든 걸 알아달라는 어린애와 같았다. 당장 어제 지구로 오는 행성을 파괴한 센티넬이 오늘은 점심이 카레가 아니라며 조리원에게 화내는 것만 봐도 양반이라 할 정도였다. 이런 어린 정신 연령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한 정부는 결국 몇몇 심리 상담가를 센터로 보냈지만 결국 모두 도망갔다. 비어버린 상담가의 자리를 채운 것은 가이드 약사인 홍중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딩으로 육체와 정신이 치료가 됐지만 가이드는 아녔다. 센티넬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남을 치료했고 그것이 곧 자신에게 독이 됐다. 이런 가이드를 위해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홍중의 일이었다. 하지만 센티넬의 상담 또한 급한 자리인 만큼 홍중에게 지속해서 제안했고 거절을 수없이 했다. 마지막으로 센티넬의 총팀장까지 와서 알려준 통장에 들어갈 막대한 0은 결국 홍중의 발걸음도 돌렸다.
처음부터 쉬울거라 생각하지지 않았다. 못 배운 만큼 가르쳐야 할 게 많았고 제대로 스트레스와 PTSD를 풀지 못하는 그들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애잔함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홍중은 저도 모르게 연필을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나부터 상담을 받아야 하나. 실없는 걱정을 하며 센터를 가로지르던 중 입구가 열리며 침대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을 마주했다.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위로 한 사람이 이마에 손을 대고 다른 세 명은 침대를 빠르게 밀었다. 정신 없는 소란 속 홍중은 살짝 옆으로 비켜 길을 틔었고 그대로 퇴근했다. 더 이상 이 피곤하고 불쾌한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성화의 카페로 향했다. 같은 초능력자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는 센티넬과 달리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웃어주는 성화는 참 예뻤다. 유리창 너머로 고객을 응대하는 성화를 보고 있으니, 성화가 고개를 들어 홍중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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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땠어?”
성화가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홍중에게 내밀며 건너편에 앉았다. 커피는 안 좋아하면서 커피집을 하는 성화가 모순적이었지만 커피가 있어서 너를 만났다는 실없는 소리에 홍중은 그러려니 했다. 성화가 내려준 커피 한 모금 마시니 오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심각한 애는 두 명이라서 괜찮았어. 나머지는 그냥 엄살.”
“진짜? 근데.. 엄살이 아닐 수도 있잖아.”
1년 넘게 사귄 성화는 남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가장 가까이서 센티넬을 진단하는 저보다 더 걱정하고 약 처방을 권유할 정도였다. 너무 과하다고 했지만 성화는 네가 조금 더 공감해 보라며 홍중을 타박하기도 했다. 이제는 성화의 반응에 익숙해진 만큼 홍중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으로 약 처방을 토독토독 눌렀다. 홍중의 손가락을 본 성화가 조금은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액정을 가렸다.
“오랜만에 애인 봤는데 핸드폰만 볼 거야? 처방 꼭 지금 해야 해?”
“오늘은 창고 청소했나 보지?”
“너 온다고 알바생도 미리 퇴근시켰어.”
설렘을 담아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야살스럽게 느껴졌다. 성화의 신호를 알아챈 홍중은 결국 액정을 끄고 가게 문의 Closed 푯말을 돌렸다. 역겨운 그들 생각을 빨리 지우고 사랑스러운 제 애인만 생각하고 싶었다. 가장 약한 불빛만 켜놓고 성화가 창고 문을 열고 홍중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홍중은 성화를 벽으로 밀치며 입을 맞췄다. 성화의 컨퍼런스로 인해 2주일간 보지 못했고 그 공허를 채우려면 손길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서로의 숨결이 너무 달았고 그 단맛이 아쉬운 듯 몸을 더 밀착하며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성화가 먼저 앞치마를 벗으며 옆으로 던져놓고 홍중이 성화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성화도 홍중의 면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고 그의 배를 만지는 순간 밖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받지 마. 급한 거 아니잖아.”
“미안. 받아야 할 거 같아.”
홍중이 아쉬운 듯 입술을 내밀고 성화가 그의 입술을 살짝 물고 창고를 나갔다. 칠칠하지 못하긴. 성화가 떨어뜨리고 간 앞치마를 들어서 탁탁 먼지를 털고 홍중도 성화를 따라 나갔다. 꽤 심각한 전화였는지 성화는 굳은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 홍중이 다가오자 성화가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미안한데 나 집에 일이 생겨서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아.”
“데려다줄까?”
“아냐. 그냥 나 카페 뒷정리만 맡겨도 될까?”
“응. 알겠어. 연락해.”
“사랑해 홍중아.”
초조한 손길로 핸드폰과 제 물건을 챙기는 성화에게 홍중이 제 볼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성화가 가장 좋아하는 행동이었지만 정말 큰 일이 난 건지 성화는 그 행동도 보지 못한 채 손을 흔들며 카페를 나갔다. 꽤 서운함이 들었지만 홍중은 어깨를 으쓱이며 카페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깔끔한 성격 탓에 카페도 이미 정리가 거의 다 된 상태였고 홍중이 정리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만 끄고 나가야지, 생각으로 카운터에 오는데 홍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성격의 애가 아닌데 카운터는 마치 홍중이 쓰는 책상처럼 모든 것이 어질러져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과 함께 카운터를 치우는데 못 보던 약 봉투가 손에 걸렸다.
제가 알기론 성화는 약을 잘 먹지 않았다. 청결만큼이나 건강을 생각해서 비타민이면 비타민이지 약을 먹을만한 지병을 앓고 있지 않았다. 약 봉투를 유심히 보다가 겉에 적힌 이름에 홍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약 봉투에는 성화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아마 손님이 놓고 가서 성화가 챙겨놓은 듯했다.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었지만 피곤함에 금세 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서는 홍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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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단란한 저녁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과일을 가져와 홍중의 옆에 앉고 그 과일을 아버지가 맛있게 깎아 포크에 찍어 홍중에게 건넸다. 뒤늦게 온 형이 왜 나는 빼냐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모두가 웃음보가 터져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저녁이었다.
물을 가져오겠다며 일어난 형이 창문 밖으로 시선이 꽂히고 행동이 멈췄다. 이상함을 느낀 어머니가 그곳으로 걸어갔을 때 강렬한 섬광이 눈을 찔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깔끔하게 정리돼 있던 집은 난장판이 되고 이곳저곳이 불에 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으려 크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매운 연기뿐이었다.
뜨거운 불길과 매캐한 연기로 홍중도 제대로 눈을 뜨고 숨쉬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꿋꿋이 참으며 불길이 덜한 곳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이런 남자가 우리집에 있던가? 생각도 잠시 남자는 괴로운지 자기 머리를 잡은 채 절규하고 있었다. 또 놀라운 점은 그 절규에 따라 불길이 강해지는가 하면 사그라지기도 했다. 그 뜨거운 불꽃들 사이로 홍중이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남자와 홍중이 눈이 마주쳤을 때 남자는 울기 시작했다.
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홍중이 당황해 남자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남자는 완강했다. 뚝뚝 흘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바닥에 그대로 떨어뜨렸다. 눈물자국이 바닥에 새겨질 때마다 불꽃이 살아났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은 듯 홍중의 손목을 잡았다.
‘미안해.’
그리고 알 수 없는 사과를 끝으로 홍중의 정신이 멸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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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악몽이었다. 한동안 성화를 만나고 나서 꾸지 않던 악몽이 이렇게 나타난 것은 그리 좋은 신호는 아녔다. 잊었던 고통은 새롭게 다가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올라오는 환상통에 홍중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것은 환상이다, 그날은 이미 끝난 일이다. 되새기는 망각에 다행히 환상통은 금세 사라졌다. 사라짐과 동시에 홍중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번 주가 성화가 좋아하는 밴드의 첫 콘서트 날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콘서트 안 잊었지?’
홍중은 성화에게 문자를 보내며 출근 카드를 찍었다. 어젯밤에 급하게 간 이후로 성화는 문자 하나 없었다. 문제는 잘 해결된 건지, 아니면 여전히 해결중인 건지. 성화가 이렇게 갑자기 갔을 때 연락 두절은 다반사였다. 항상 화가 섞인 말투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때만 넘길 뿐 성화는 그대로였다. 반복되는 싸움에 지친 기분이 들 때 그나마 친한 센티넬인 윤호가 다가와 홍중의 허리를 살짝 쳤다.
“우리 멋쟁이 의사 선생님 아니셔.”
“약 다 먹었어? 이제 필요 없어?”
“음? 나? 아아 우리 애기 말한 거구나.”
센터 밖에서는 불법이었지만 센터 내에서는 암암리로 합법인 것이 대리 처방이었다. 센티넬이 가이드의 약을 대신 처방받아 오기도, 가이드가 센티넬의 약을 대신 처방 받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윤호 또한 속칭 애기인 제 가이드를 위해 일주일 전에 약을 처방해갔다. 불면증에 가이딩 또한 불안정해서 윤호가 와서 울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다. 원래 눈물이 많은 애라는 걸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형 어제 우리 센터 난리 난 거 알아?”
“왜?”
“어제 빙결계 센티넬 한 명 폭주해서 죽었어.”
“죽는 일이야 너희한테는 숨 쉬는 만큼 익숙하잖아.”
“어제는 좀 달랐어.”
폭주 진정시키려고 온 센티넬까지 죽일 뻔했거든. 별 흥미는 없었지만 한 마디 맞장구쳐주니 윤호는 어제 일을 낱낱이 말했다. 가이드도 없는 애가 제어를 하지 못하고 능력치 이상의 힘을 쓰고 센터로 들어왔고, 발끝부터 얼어붙기 시작하는 센티넬을 녹이기 위해 화염계 센티넬이 투입됐다고 했다. 하지만 빙결계 센티넬은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한 건지 얼음조각을 화염계 센티넬에게 꽂은 게 윤호의 말이었다. 제 진료실의 문고리를 잡은 홍중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 화염계 센티넬 죽었어?”
“안 죽지. 단번에 녹여버렸을걸? 근데 심장에 물이 차서 그거 회복하느라 회복실에 있어.”
“회복실 나도 들어갈 수 있어?”
“누군지 궁금해? 나랑 친해서 들어갈 수는 있는데.”
그 순간 홍중의 핸드폰이 띠링 울렸다.
-‘당연히 안 잊었지. 드디어 우리 오빠들을 영접하다니.’
-‘네가 나이가 더 많아.’
“가볼 거야?”
“아냐 됐어. 어차피 상담 예약 있어서 그거 준비해야 해.”
“형은 그럴 줄 알았어. 애기 약 더 필요하면 말할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지운 채 홍중은 진료실로 들어가고 상담을 위해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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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상담 및 처방을 끝내고 서둘러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오늘은 피곤해서 카페를 안 열고 집에서 쉰다는 성화에 떡볶이와 치킨을 포장해서 갈 예정이었다. 미리 주문을 한 뒤 나가려는데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제가 알기론 일주일 전에 약을 처방해 간 가이드였다.
“또 오셨어요? 오늘 진료는 끝났는데.”
“그.. 어제 갑자기 증상이 심해져서. 약을 좀 더 강한 거로 받을 수 없을까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도 환각 증상이 심하다고 해서 센 약으로 처방해 줬는데 그 약이 약하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였다. 홍중은 다시 제 컴퓨터를 틀며 가이드를 의자에 앉혔다.
“가이드님이 드시는 게 아니고 센티넬 주는 거죠?”
가이드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띄었다. 가이드의 몸은 보통 인간비슷하지만 센티넬은 인간의 인간의 몸에 몇 배로 강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가이드에게 강한 약이라도 센티넬에게는 기별도 안 갈 수준이었다.
“그동안 타갔던 약, 모두 센티넬이 먹은 거예요?”
“..네. 제 센티넬이 좀 트라우마가 심한지 환각을 자주 본다고 하더라고요.”
“환각의 내용은 들어보셨어요?”
“아뇨. 그냥 첫 살인이 일어났을 때라고만 했어요. 그날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그냥 보통 센티넬들이 갖고 있는 PTSD네요. 센티넬 전용으로 약 처방해 드릴 테니 증상 나타날 때 드시라고 하세요.”
가이드에게 처방한 약을 준 뒤 나가려는데 성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을 보니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배고플 성화를 위해 겉옷도 입지 않고 팔에 건 채 전화를 받으며 나갔다.
-“언제 와? 배고픈데.”
“미안. 갑자기 누가 상담 와서. 금방 갈 거야.”
-“얼마나 걸려?”
“치킨이랑 떡볶이 포장해서 가져가면.. 대략 40분?”
-“알겠엉. 빨리 와.”
많이 배고픈가 보네. 홍중은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와 달리 행동을 빠르게 해서인지, 차가 밀리지 않아서인지 40분은 족히 걸릴 시간이 30분으로 단축됐다. 즐거운 마음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덜렁대는 애도 아닌데 떡볶이가 그렇게 신나나? 홍중은 의아한 생각으로 도어락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말 덜렁댔던 것이 맞은지 성화는 머리가 조금 흐트러진 상태로 홍중을 맞이하고 그의 옆에 떨어진 식탁 물건들이 보였다.
“그렇게 떡볶이가 설렜어? 정돈 좀 하지.”
홍중이 집으로 들어가며 식탁에 떡볶이를 올리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하나씩 줍던 도중 기시감이 드는 물건이 홍중의 눈에 보였다. 그 물건을 잡으려는 순간 성화가 먼저였다. 잡은 물건을 주머니 속에 넣고 홍중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약이야?”
“그냥 카페 손님이 놓고 간 약이야.”
“카페 손님 것을 왜 집까지 가져왔어?”
“퇴근하다가 우연히 가방 속에 들어간거야. 진짜 별거 아니야.”
“그럼 보여줘. 숨길 이유가 없잖아.”
그 순간 안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홍중이 성화를 지나쳐 안방으로 향했다. 성화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홍중이 안방 문을 여는 게 빨랐다.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안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을 켜자 살짝 살랑이는 커튼만 있을 뿐 평소 성화의 방이었다. 그제야 성화가 홍중의 등을 안으며 말했다.
“오늘 좀 힘든 일 있었어?”
“..이상하네. 꿈 때문인가. 미안해. 좀 예민했다.”
“괜찮아. 배고프면 사람이 예민해져. 얼른 먹자.”
성화가 안방 문을 닫으며 홍중을 당겼다. 홍중도 닫히는 문을 보며 이 이상한 육감을 안방에 넣었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성화는 이번 주 콘서트에 대한 기대감을 펼쳐놨다. 보컬의 목소리를 실제로 두 귀로 듣는 것 하며 베이스의 웅장함을 직접 느끼고 일렉 기타의 화려함에 매혹될 거란 상상에 행복해 보였다. 얼추 배가 부른 홍중은 포크를 내려놓고 성화의 장황한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진짜 실제로 들으면 반할 거야. 이런 가수가 대성해야 하는데.”
“그렇게 대성할 가수가 첫 콘서트가 너무 빈약한 곳에서 하는 거 아냐?”
“원래 밑바닥부터 올라와야 서사가 완벽한 거지.”
닭다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밴드를 결성하게 된 모습부터 첫 앨범이 나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읊는 거에 정신이 팔려 제 입에 무엇이 묻은지도 모르는 듯했다. 깔끔하면서 은근히 덜렁대는 성화에 홍중은 엄지 손가락으로 성화의 입꼬리에 묻은 치킨 조각을 떼서 제 입에 넣었다. 그러자 성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야.. 그걸 왜 먹어!!”
“침도 섞고 몸도 섞는 마당에 이 정도도 못 먹냐.”
“못 하는 말이 없어.”
성화가 부끄러운 듯 홍중의 정강이를 살짝 찼다. 그리고 다시 치킨을 먹는 성화에 홍중은 달라진 게 없는데 괜히 성화를 의심한 것이 미안해졌다. 미안함의 표시로 콜라를 건네고 성화는 꿀꺽꿀꺽 맛있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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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부터 똑같은 상황에 홍중은 지쳐서 질린 상태였다. 퇴근할 때 동생한테 문제가 생겨서 동생네 집에 갔다가 콘서트장으로 바로 가겠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또 연락 두절이었다. 오늘 아침에 보낸 카톡의 1도 사라지지 않고 전화도 5번이나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아침에 카톡을 안 보는 것부터 눈치챘어야 하는데 성화에 대해 관대함은 기대하게 했고 결국 실망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진짜 실망이다.”
홍중은 성화에게 문자를 보낸 뒤 티켓을 확 찢어버렸다. 보통 이렇게 연락이 안 됐을 때는 그다음 날까지 무응답이 이어졌으니 당연히 콘서트도 물 건너갈 예정이었다. 입장하는 사람들과 입장 시간이 다 됐다는 스태프를 보고 홍중은 뒤돌아섰다.
그냥 집으로 갈까 했지만 타이밍 좋게 윤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 평소 같았으면 달갑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술이 너무 당겼다. 순간이동 능력의 윤호이기에 홍중은 제 집으로 윤호를 불렀고 홍중이 전화하자마자 앞에 나타나는 윤호에 홍중은 기절할 뻔했다. 몇 번을 봐도 놀라운 능력이었다. 사람 작작 놀리라며 윤호를 작게 타박한 뒤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술이 너무 달았고 주량을 한참 넘어섰지만 이상하게 취하지도 않았다. 되려 윤호가 살짝 혀가 꼬여 제 애기를 자랑하기 시작했고 홍중은 반쯤 넋 나간 얼굴로 보지도 못한 그의 애기 칭찬을 들었다.
“진짜 우리 애기는.. 너무 착해. 자기 아픈 것도 숨기고 맨날 내 생각만 해주고..”
“아픈 거 이야기 안 해주면 섭섭하잖아.”
“그건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아프다고 말하면 가이딩 안 받을 날 너무 잘 알아서.. 다 사랑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홍중은 소주잔을 비웠다. 성화도 나를 사랑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하지만 사랑으로 덮기엔 그 정도가 지나쳤다. 몇 번씩 연락이 끊기는 사람과 어떻게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초반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집안 사정이 생겨 동생한테 간다 해도 그날 당일에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센터에 들어가고 일하면서 성화의 연락 두절이 잦아졌다.
한잔 두잔 더 기울이다 윤호가 제 무릎에 고개를 묻고 제 애인한테 술주정을 부리는 사이 홍중에게도 전화가 왔다. 그리운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받을까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툭 끊기고 짧은 진동이 울렸다.
-“집 앞인데 잠깐 볼 수 있을까?”
이미 성화에게 화가 많이 난 상태였지만 창문 밑으로 서서 핸드폰만 보는 정수리를 보자니 마음이 강해질 수가 없었다. 결국 윤호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며 듣지도 않을 말을 한 뒤 밖으로 나갔다. 1층 문이 열리자 성화가 곧바로 돌아서 홍중을 보고 홍중에게 걸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화는 엊그저께보다 눈에 띄게 얼굴이 상해 있었다. 연락도 없이 이 정도로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이유를 먼저 물으려 했지만 성화의 사과가 먼저였다.
“오늘은 진짜 미안해.”
“무슨 일인데? 이유부터 말해.”
“..이유는 말 못 하는 거 알잖아. 그냥 집안 사정..”
“맨날. 너는 맨날 집안 사정이라고 말을 돌리고 이유를 단 한 번도 말 안 했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야?”
화를 내는 홍중의 모습이 예상외였는지 성화가 당황한 낯빛이었다. 하지만 금세 홍중의 입장이 이해가 된 성화도 다시 표정을 풀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었잖아. 오늘 일은 진짜 미안해.”
“이쯤 되면 왜 그러는 건지 이유라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항상 너 연락 끊기면 기다리고 돌아오면 좋아하고. 이게 연인이야?”
지금도 성화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됐다. 사과만 해서 끝날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사과뿐만 아니라 이유도 말을 해줘야 했다. 자그마치 몇 달을 이렇게 기다려줬으면 성화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너무 당연하게 연락이 없고 다시 나타나길 일쑤였다. 똑같은 성화의 모습에 홍중은 몸을 돌렸고 뒤에서 성화가 다급하게 홍중을 붙잡았다.
“이유 말해주면 이해할 거야?”
“뭔데?”
“무슨 이유여도 다 이해해 줄 거냐고.”
“적어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네가 싫어할 이유야. 말하면 뻔히 네가 날 떠날 거고. 그래도 듣고 싶어?”
이렇게까지 질질 끌며 두서를 붙이는 이유가 뭘까. 만약 홍중이 이해심이 더 넓었더라면, 아님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었다면 홍중도 이유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몇 달이 반복되고 홍중의 이해심은 바닥이 보인 상태였다. 홍중이 거칠게 성화의 손을 털었다.
“미안. 이제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을 거 같아.”
결국 이 연애의 끝을 마무리한 건 성화의 묵인이었다.
-
남들은 이별하면 우느라 일을 못 하고, 힘들어서 쓰러지고 한다던데 홍중은 어제와 모든 것이 같았다. 어제처럼 센티넬을 만나 상담을 하고, 가이드를 만나 약을 처방해 주고, 똑같이 밥을 먹고 모든 것이 같았다. 이렇게까지 멀쩡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홍중은 너무 멀쩡했다. 되려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윤호가 아메리카노를 사와 홍중의 책상에 올리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 형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이별이 뭐 대수라고. 이별한다고 돈을 더 주진 않는다.”
“형 사실은 센티넬 아니야? 멘탈이 뭐 이리 강해.”
“정우영 같은 놈들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윤호도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이유는 안 들었어? 나 같으면 이유라도 듣고 헤어졌을 텐데.”
“이유 듣는다고 달라질 거였으면 이미 들었지.”
홍중은 연필꽂이에 꽂힌 만년필을 응시했다. 처음 같이 맞이한 생일에 성화가 선물로 준 만년필이었다. 자기와 달리 볼펜을 많이 쓰는 홍중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며 준 선물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쓸 때마다 자기 생각해달라는 무언의 뜻도 있었고 홍중도 그것을 매우 잘 알았다. 괜히 볼펜들 사이로 만년필을 숨기고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차라리 생각을 지우려면 일이 편했다.
“힘들면 말해. 언제든지 술 마셔줄게.”
“너랑 술 마시는 게 더 힘든 건 모르지?”
“어.. 그건 몰랐는데.”
윤호가 웃으며 진료실을 나가고 홍중이 한숨 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윤호의 말처럼 이유라도 들었어야 하나 후회가 잠깐 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무슨 이유를 들어도 홍중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환자 정보를 위해 모니터를 쳐다봤지만 자꾸 글씨가 여러 개로 흩어지고 붕 떠 있는 기분에 결국 홍중은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겉모습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이미 마음 한구석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카페를 가서 책을 읽자니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올 거 같고 운동을 가자니 몸이 너무 지쳤다. 결국 집으로 오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별 후유증인가. 핸드폰을 봐도 수많은 연락 중 성화의 연락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너한테는 끝내도 상관없는 관계였구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홍중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매캐한 연기가 콧속을 파고들 때였다. 콜록콜록 기침하며 겨우 숨을 가다듬었을 때 주변은 온통 회색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이렌도 울렸지만 이미 방안을 가득 채운 연기 때문에 현관문이 잘 보이지 않았고 빌어먹게도 PTSD가 갑자기 도졌다.
어릴 적 무력하게 쓰러지고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던 날, 그때의 무거운 기억이 홍중을 짓눌렀고 숨까지 턱 막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아무리 쳐도 막혀오는 숨은 정신까지 아찔하게 만들었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이 정신을 잃으려 할 때 불길을 뚫고 누군가 홍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괴로움에 사무쳐 제힘을 감당하지 못했던 어린 센티넬.
우리 가족을 화염 속에 몰아넣은 나의 증오의 대상이자 영웅인 화염계 센티넬.
항상 이유 없이 연락 두절되고 사라지던 제 애인.
그제야 기시감이 들던 약 봉투의 이름.
그 모든 것이 박성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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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처럼 성화는 제 손을 붙잡고 울었다. 제어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게 능력을 사용해서 미안하다고. 그날 성화와 이야기하며 처음 알았다. 어린 센티넬들은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서 폭주하는 경우가 많고 성화는 매년 제 가족의 묘를 찾아왔던 사실을.
또한 성화는 그날 이후로 제 폭주의 영향을 알 수 있었다. 주변 살아있는 사람의 기억을 불태워버린다는 것을. 그 또한 폭주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약을 먹고 버텼다. 그리고 다시 홍중을 만났을 때 더 강해진 아픔에 가이드를 통해 강한 약을 받은 것까지. 그동안의 성화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의 끝에는 성화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이젠 숨길 것이 없어 후련한 얼굴로 끝을 마무리했다. 홍중의 이야기를 들은 성화도, 성화의 이야기를 들은 홍중도 서로를 이해했다. 증오의 대상이 잘못됐다는 것과 몇십년간 쌓였던 오해들이 단숨에 풀리고 되려 홍중은 성화를 안아줬다. 그동안 자기만큼이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성화를 달랬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화는 여전히 센터의 센티넬로 살아가고 홍중은 센터의 상담일을 그만뒀다. 제 그릇된 사상으로 오히려 센티넬을 괴롭게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상담을 받던 센티넬들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발목을 붙잡았지만 홍중은 그곳을 벗어났다. 저조차 고통 속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센터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성화의 가이드를 만났다. 카운터 위 약 봉투, 성화가 다급하게 숨긴 약 봉투 이름의 장본인이었다. 그때 느꼈던 익숙함을 조금 더 파헤쳤다면 미리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늦은 게 후회가 됐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마음이 편했다. 가이드에게 흰 비닐봉지를 건넸고 그 내용물을 본 가이드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센티넬이 힘들다 하면 이 약 먹여요. 물론 최대한 버티라고 하고.”
나만큼이나 괴로웠을 성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이었다. 약사로서, 그동안 증오에 대한 사과로 이 정도면 성화는 충분히 받을 것이다. 가이드가 숨겨서 밉지 않냐고 물었을 때 홍중은 대답하기 대신에 웃어 보였다. 사람을 미워하기엔 사랑하는 시간도 부족하니까.
우연히 길을 가다가 성화가 좋아하는 밴드의 콘서트 소식을 들었다. 성화와 헤어지고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는데 이런 우연은 홍중의 낭만을 충족시켰다. 한 장을 예매하려다 혹시 몰라 두 장을 예매했다. 버려야 할 습관 중 하나인 것을 알았지만 아직도 못 버린 것이 이 습관과 추억이었다. 어차피 그가 안 올 확률이 더 높았지만 적어도 기회는 주고 싶었다.
다시 온 밴드의 콘서트장은 이전보다 조금 더 큰 콘서트홀에서 진행됐다. 제 자리를 찾아가서 앉고 콘서트의 시작을 기다리며 계속 옆자리를 쳐다봤다.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날 너무 큰 기대에 데여 홍중은 교훈을 얻었고 자기방어를 위해 기대는 접었다. 끝끝내 옆자리는 채워지지 않고 콘서트는 시작했다.
모든 밴드 멤버가 제 자리에 서고 보컬이 스탠드 마이크에 손을 올렸다. 항상 콘서트를 시작할 때 취하는 스타트였다. 재빠르게 시작을 눈치 챈 홍중이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 무대에 포커스를 맞췄다. 가장 이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위해, 오고 싶어도 이 무대를 즐기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포기한 그를 위해, 홍중은 기꺼이 카메라를 들고 영상으로 기록을 남겼다.